40년의 동행, “후원은 나를 돌보는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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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동행, “후원은 나를 돌보는 길이었습니다” 1080 1080 관리자

40년의 동행, “후원은 나를 돌보는 길이었습니다”

엔젤스헤이븐의 숨은 영웅, 신경숙 후원자님 인터뷰

 

엔젤스헤이븐은 이번에 무려 40년 동안 아이들과 동행해 주신 한 분의 후원자님을 만났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셨지만, 저희에게 후원자님은 오랜 시간 아이들을 지켜주신 든든한 영웅이셨습니다.

엔젤스헤이븐의 숨은 영웅, 신경숙 후원자님을 소개합니다. 한성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신 신경숙 후원자님은, 지난 40년간 정기 후원은 물론 장학금 지원을 통해 엔젤스헤이븐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엔젤스헤이븐의 아이들 역시 후원자님의 제자이기도 한 셈입니다.

신경숙 후원자님과 엔젤스헤이븐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기부를 하며 꿈꿔왔던 미래를 이루셨다는 후원자님의 이야기는 기부가 도움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도 삶의 동력이자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또 ‘이기적인 후원’이라는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는 표현 속에는 후원이 가진 진짜 가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숨어있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신경숙 후원자님과 엔젤스헤이븐의 특별한 동행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까요?

 

 

Q. 안녕하세요, 후원자님.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종종 저 혼자 엔젤스헤이븐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인연이 시작된 지 사십 년이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직장이었던 학교에서 퇴직했지만, 엔젤스헤이븐과의 인연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Q. 어떻게 엔젤스헤이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는지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1980년대 <2000년>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기관지였던) 이 잡지에 조규환 원장님, 아이들의 사진 그리고 은평천사원 이야기가 꽤 길게 실렸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4면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일을 하지 못했고, 돈도 없어 한 달에 보름은 천 원짜리 한 장을 책꽂이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기만 할 때였습니다. 그게 매번 그달의 마지막 남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막하기만 할 때였죠. 그때 그 기사를 봤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기도 이렇게 버거운데,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원장님과 천사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저와 너무 대비되었습니다. 한편, 그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출세를 다 내려놓고 이런 길을 선택하시다니. 그리곤 방안을 서성이며 그 기사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 생각해봤습니다.

처음으로 내게도 아직 가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사원 아이들도 내 수준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미치자, 천사원에 편지를 보내고(그때는 이메일이 없었죠),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생활비가 바닥을 보일 게 뻔하니, 일단 후원금을 먼저 떼어놓고 시작했습니다.

조규환 회장님과 아이의 사진(좌), 80년대 후반 천사원의 모습(우)

 

Q. 힘든 시절에도 후원을 이어가며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후원자님께 그 약속과 나눔은 어떤 의미였는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후원의 첫 결심은 ‘설마 십 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고 있을까? 넉넉잡아 십 년 후엔 내가 번 수입으로 후원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제게 십 년은 마치 아득한 먼 미래로 여겨졌죠. 저 자신에게 십 년이라는 아주 긴 시간의 여유를 주며, 그사이 열심히 살아보자 했었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아니 딱 십 년이 되었을 때, 대학 전임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설마, 설마, 설마 정말 십 년?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한 달의 오차도 없는 십 년이었습니다. 옛 기억이어서 정확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제 계산으론 딱 십 년이었습니다. 아, 이런! 정말 십 년만에 내가 원했던 직업을 갖게 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오 년으로 상상해 볼 걸.

하지만 십 년의 후원이 제 직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딱 알맞은 십 년이었습니다. 제가 자라나기까지, 딱 십 년이 필요했습니다. 막연했던 그 십 년의 약속이 없었으면, 제가 그토록 원했던 일자리도 없었죠. 너무나도 정확한 삶의 시간들입니다.

Q. 긴 시간 동안 엔젤스헤이븐의 아이들을 위해 후원해 주셨습니다. 특히 장학금 후원은 아이들에게 많은 배움의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셨을 때도 후원만큼은 멈추지 않으셨는데, 그렇게 후원을 꾸준히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1995년 전임교수가 되었고, 1997년 IMF가 터졌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신문 기사들은 연일 암울한 기사를 올렸지만, 저는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이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신났죠. 이렇게 사람의 마음은 얄팍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 뉴스가 저를 휘감았습니다. 가족들이 무너지고 아이들마저 떠돌게 된 상황. ’아,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자식과 이 아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다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생각하다가 고등학생, 중학생 두 아이를 불러놓고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학원을 안 가면, 천사원의 아이 한 명을 대학에 보낼 수 있어. 동의해 줘!’ 아이들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천사원의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이 학원에 안 갈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해서 후원에 두 가지 변화가 왔습니다. 하나는 기존 후원금을 네 배로 늘리는 것, 다른 하나는 고교 졸업 후 보호종료아동(자립준비청년들을 그때는 이렇게 불렀죠.)의 등록금을 보태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장학 후원을 했다기보다, 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를 미리 준비했던 것입니다. 매우 ‘이기적인 후원’이었죠. 지금도 나와 자식을 돌봤던 이 방법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엔젤스헤이븐이 돌보고 있는 자립준비청년들(좌), 자립준비청년 교육 현장(우)

 

Q. 후원하는 기간 동안 접하신 기관 소식이나 아이들 소식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으셨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때마다 보내주시는 아이들 소식과 사진은 늘 저희 집 탁자 위에 놓여 있습니다. 볼 때마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외향적이지 않은 탓에 아이들을 직접 만나볼 엄두는 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해 추석 즈음, 엔젤스헤이븐을 잠시 들렸습니다. 숫기가 없는 편이라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그만 조준호 대표님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대표님은 시설 몇 곳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후원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소개까지 해주시다니. 그런데 여기저기 돌아보는 사이, 제 마음엔 점점 다행스러움과 감사함이 들어찼습니다. 처음 후원을 결심했을 때 엿보았던 천사원의 진심 어린 보살핌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 안에서 ‘돌봄’, ‘후원’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낡은 생각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에 비해 이곳은 원생들에게 ‘한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애써왔는지를 깨닫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엔젤스헤이븐의 해외 사업을 알아보려 홈페이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다가 엔젤스헤이븐이 그사이 이 시대의 필요에 맞춰 움직여온 새로운 자취들을 발견했습니다. 게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동영상까지 전부 놓치지 않고 끝까지 봤죠. 또 한 번 탁 내리치는 죽비를 맞은 듯했습니다. 나는 퇴직했고, 이렇게 삶이 조금씩 끝을 향하는가 싶었는데, 엔젤스헤이븐은 그간 ‘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더 넓고 깊이있게 나아간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후원의 의미는 옛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엔젤스헤이븐의 돌봄은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던 거죠. 작은 손길들을 모아 이렇게 ‘진짜 돌봄’을 위해 움직여온 엔젤스헤이븐의 역사에 감탄했습니다. 또 한 번 인생을 배웠습니다.

 

엔젤스헤이븐 우간다 해외 사업 현장의 사진

 

Q. 후원의 의미와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후원자님으로서, 혹시 다른 분들에게도 후원을 권유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또 어떤 점이 다른 분들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제게 후원은 타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돕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나를 돌보기 위한 후원’을 계속해 왔습니다. 모든 후원이 예외 없이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엔젤스헤이븐이 거기에 있어, 나 대신 해주신 그 모든 일들 덕분에 오늘 나와 내 가족, 내 주변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쉽고도 다행스러운 일인가요.

Q. 수많은 기관 중 엔젤스헤이븐을 택해, 함께 오랜 시간 동행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기관에 특별히 바라는 점이 있으실까요?

엔젤스헤이븐이 지금 보여주시는 ‘변화’ 자체가 제게는 감동입니다. 지금처럼 때맞춰 변화를 ‘거듭’ 해주시면 저 또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 한 명을 그 사람 인생 자체의 존귀와 권리로 봐주셨던 그대로 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엔젤스헤이븐의 존재 이유지요.

 

Q. 마지막으로, 후원하고 계신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일 어려운 말이네요. 그래도 한마디 한다면, 많이 배우라고, 억지로라도 배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 엔젤스헤이븐의 지붕 아래 있을 때, 많이 많이, 더 많이 배워두면, 앞이 보이는 날이 올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려웠던 시절에도 “아이들도 내 수준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시작된 작은 결심은,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지켜온 큰 동행이 되었습니다.

신경숙 후원자님은 후원을 “타인을 돕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보는 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적인 후원’이라 표현하셨지만, 그 속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후원자님의 후원은 아이들이 잘 자라나야 내 가족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 동시에 미래 세대를 향한 책임감과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실천이었습니다. 결국 후원은 아이들을 위한 일이자 동시에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갈 세상을 지켜내는 길이었습니다.

엔젤스헤이븐은 그 진심이 헛되이 흘러가지 않도록 다리 역할을 해왔습니다. 후원자님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배움과 돌봄, 그리고 존엄을 지켜주는 구체적인 지원으로 이어왔습니다. 덕분에 후원은 한 아이의 삶을 지키는 것을 넘어,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하게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후원은 누군가를 단순히 돕는 일이 아니라, 삶을 함께 나누고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약속입니다. 신경숙 후원자님의 40년 동행은 그 소중한 가치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엔젤스헤이븐은 앞으로도 이런 특별한 동행들과 함께 아이들의 내일을 지켜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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